[우울증 수기] 19. 내 편에게 칭찬을 우울증 수기

  얼마 전 남편이 처음으로 버럭했다. 그 전까지 나는 시댁 때문에 속상할 때마다 남편에게 솔직히 표현하기를 망설였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아무리 우리 가족이 잘못을 했어도 남이 지적한다면 싫을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사가 나는 환자니까 걱정 말고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낫는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내가 슬퍼하거나 화를 낼 때 반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라고 했다.
  용기를 얻어서, 예전 일이 생각나 감정이 올라올 때 옆에 남편이 있으면 바로 얘기를 했다. 남편은 주로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래서 상담사 말대로 반응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꼭 시댁 얘기만이 아니라도, 내가 슬퍼하면 '슬퍼해도 괜찮아.', '그렇구나. 많이 속상했구나.' 이런 말을 하라고 대사까지 정해줬다. 정 기억이 안 나면 '그렇구나.'만이라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별로 떠올려내지 못했다. 항상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날은 시댁 때문에 속상했던 얘기를 하는데 남편이 시댁 입장을 나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다. 나이 많은 어른이 바뀌는 일이 어디 쉽겠냐는 둥, 일부러 나를 속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둥 설득했다. 나는 화가 나서 왜 나를 설득하려고 하냐고 물었다. 나이가 얼마고 의도가 어쨌든 내가 상처받았는데 그게 중요하냐고 소리쳤다. 다 필요 없고 '그렇구나.'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얘기했지 않냐고 몰아세웠다. 그러자 남편이 버럭했다.
  "나도 힘들어서 그렇지. 네가 이렇게 아파서 나도 힘들다고."
  내가 걱정했듯 남편도 역시 힘들었다. 돌이켜보니 남편이 이렇게 잘해주는데 나는 받기만 했다. 칭찬 한 번 제대로 한 기억이 없었다. 본성이 이해심이 많은 사람인데 나만 이해해달라고 조른 내가 나빴다. 상담사는 남편 칭찬을 많이 해주라고 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칭찬을 받고 나면 더 어려운 일도 해주고 싶어진다고 강조했다.
  이제부터는 남편에게만 이렇게 해줘 저렇게 해줘 강요하지 않고 나도 달라지겠다. 진짜로 칭찬을 하니까 좋아하는 얼굴이 보인다. 고맙고 소중한 내 편.








[우울증 수기] 18. 트라우마 우울증 수기

  그림책을 보았다. 등장인물은 할머니와 동물들, 드리고 수박씨다. 할머니는 수박씨를 땅에 심는다. 그 모습을 본 강아지는 할머니가 귀한 보물을 심은 줄 착각하고 땅을 파본다. 그런데 수박씨가 나오자 '별 거 아니네.' 하고 다시 땅을 묻는다. 이번에는 그 모습을 본 토끼가, 강아지가 뭔가 맛있는 먹이를 숨긴 줄 알고 땅을 파본다. 토끼도 수박씨임을 알고 '에이 시시해.' 하고 다시 땅에 묻는다. 이런 일을 여러 동물이 반복하자 수박씨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소리도 친다. 하지만 작아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맨 마지막으로 땅을 파본 사람은 할머니다. 자기가 씨를 심은 사실도 잊고, 다른 동물이 묻는 모습을 본 뒤에 땅을 파본다. 그랬더니 화가 잔뜩 난 수박씨가 '시시하다느니 별 볼 일 없다느니 그만들 좀 해!' 하고 말한다. 할머니는 수박씨에게 위로는 커녕 버럭 소리 친다.
  "네녀석이 꾸물거리고 싹을 틔우지 않아서 그렇잖아! 얼른 싹을 틔워!"
  그 말을 들은 수박씨는 화가 나서 싹을 틔우다 못해 온 마을을 덩굴로 뒤덮는다. 수박씨 나름대로 복수를 했지만 할머니와 동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수박 열매를 맛있게 잘라 먹는다.
  그림책을 보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른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땅에 씨를 파묻는 모습을 몰래 보고 자꾸자꾸 팠다가 묻었다가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런데 할머니와 수박씨의 관계가 드러나자, 시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겹쳐보였다.
  시아버지도 내게 위로는 커녕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야지 왜 안 했냐고, 내가 의지도 없고 자세가 문제라고 말했다. 그림책을 보니 내 편도 없이 혼자 남겨져 폭언을 들어야 했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구 때문에 우는데 마음이 안 좋으니 울지 말라고 한 시아버지도 밉고, 눈물을 닦는 내 두 손을 잡아당겨 치우려고 한 시어머니도 밉다.
  어처구니 없지만 그림책을 보고도 그 날을 다시 경험하고 되새기며 아파했다. 어쩌면 그 날이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일까? 그 일만 떠올리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찢어진다. 비슷한 사례만 봐도 그렇다. 앞으로 평생 동안 한으로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면 어쩌지? 너무나 괴롭다.
  수박씨는 복수라도 해봤는데 나는 그러지도 못한다. 게다가 복수를 했는데도 태평한 할머니와 동물들이 너무 현실적이라 소름 끼친다. 시아버지는 아마 폭언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멋지게 위로하며 명언을 남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날의 기억 자체를 벌써 잊었을 수도 있다. 원래 가해자는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피해자만 오래도록 기억하며 앓는 법이다. 내가 지금 와서 그때 감정을 고백한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 않을까? 상상만 할 뿐이다.




[우울증 수기] 17. 칭찬하지 않아도 되니 비난이나 하지 마세요 우울증 수기

  상담사에게 이번 일주일 동안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결과도 좋았다고 자랑했다. 크게 칭찬받았다. 이제 '표현하기'는 어느 정도 했으니 앞으로도 강화하되, '칭찬 받기'로 넘어가자고 했다.
   '조금만 해도 칭찬받는다'는 문장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아서 이상하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아주 잘해야 칭찬을 받지 않냐고 했다. 그럼 완벽하게 잘해야 하냐고 또 물어서, 완벽하진 않아도 칭찬할 만큼은 잘해야 한다고 답했다. 상담사가 칭찬하지 못할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말한 내용들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여서 별 문제는 찾지 못하고 넘어갔다.
  '칭찬'이나 '완벽'과 관련 있는 에피소드도 찾아보았다. 아버지가 많이 꼼꼼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일할 때도 완벽을 추구하고, 집에서도 털털한 어머니를 흉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은 별로 받아본 기억이 없어서 딱히 얘기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별 소득이 없는 듯했다.
  그러다 가장 칭찬을 받고 싶은 대상을 묻길래 '시댁'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너무 밉고 보기도 싫다고 했다. 두 가지 마음이 한꺼번에 들어 복잡했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인해 드디어 깨달았다. 내 문제는 칭찬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비난을 너무 많이 받아서 생겼다.
  결혼식 직후에 많은 주위 사람이 나보고 고생 좀 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결혼식 당일 연회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시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자신의 지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나와 내 부모님의 지인은 중간중간 지나가다 보게 되면 내가 알아서 인사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겠지만, 아는 사람들도 있는 그 자리에서 시어머니가 나에게 마구 짜증을 냈다. 얼마나 창피하고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생각나는 대로 거침없이 말해서 그렇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바라는 점이 분명하여 편했다. 시아버지는 화가 나면 뚱한 표정으로 같이 밥도 안 먹고 피한다. 그리고 나중에 적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두 시간까지 설교를 늘어놓는다. 했던 말을 여러 번 반복할 뿐 아니라, 반박이라도 하면 더 길어지기만 하고 전혀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첫 명절부터 삐걱거렸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사이에 소통을 하지 않은 탓이 컸다. 시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따랐더니 시아버지나 다른 시댁 식구가 아주 싫어했다. 일반적인 명절 풍경과 다른 방식이기는 했다. 중간에 끼어 이도 저도 못하고, 나를 향한 탐탁치 않은 시선을 느끼며 비난을 들었다. 먼저 결혼한 언니들은 내가 직접 말하지 말고 남편 입으로 말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해심 많은 남편의 말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에게만 가능한 직설적인 표현과 정곡을 찌르는 부탁을 바랐지만 남편은 너무 완곡했고 핵심을 벗어난 이야기만 했다. 결국 나는 시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고, 다행히 두 번째 명절에는 내 생각이 조금 반영되었다.
  두 번째 명절에는 이제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안심했지만 아니었다. 전날부터 전도 부치고 당일 아침 일찍 가서 제사도 지냈으니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했다. 시댁 어른이 친정에 가보라고 해서 기쁜 나머지 바로 친정에 가려고 나서는데, 그때 시어머니의 짜증 섞인 비난을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어머니 허락을 받지 않고 나가려고 해서 서운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이 블로그에 썼듯 여러 사건이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비난 뿐, 그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한 적이 드물다.
  이제 남들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시댁을 대상으로 한다고 상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못 하겠다. 우리 부모님도 칭찬은 별로 안 하셨지만, 비난을 한 적은 거의 없다. 이렇게 비난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해도 그럭저럭 살 만 했나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표현해야만 산다. 그 방법을 배워야겠지만, 시댁에도 바라는 점이 있다. 분명 비난 말고 칭찬을 한 적도 있다. 비록 정말 절실히 바랄 때는 칭찬이 아니라 비난만 돌아왔지만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칭찬 열 번보다 비난 한 번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칭찬 따위 바라지도 않을 테니 비난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울증 수기] 16. 말하고 볼 일이네 우울증 수기

  수강 중인 강의 종강일이 원래보다 일주일 미뤄졌다. 미뤄진 날에는 벌써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종강일에 못 가게 되었다.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듣는 강의인데,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사정 때문에 빠지니까 못내 아쉽고 짜증이 났다. 게다가 종강 날 받을 자료는 미리 나눠주겠다고 했지만 수강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강의도 못 듣는데 수강료까지 헛되이 날리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기로 선언했으니까 용기를 내어 전화했다. 혹시 빠지는 부분에 대해 수강료는 어떻게 되느냐고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환불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쉽네. 말하고 볼 일이네!'
  이번에는 인사이동 전에 같이 일하던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다. 자세히 말하기 힘들지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라는 내용이니 썩 반가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무서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다니 억울했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나름대로 좋은 추억이 많은데 그 정도 사이도 안 되었나? 근본적으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 역시 마음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부 인사부터 하고, 죄송하다는 사과와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말을 먼저 했다. 그 뒤에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최대한 예의를 갖춰 빙 둘러서 했다. 그래도 선배인데 날 건방지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온갖 걱정을 하며 답장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속상함에 대해 사과했고 바로잡을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도착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래. 속으로 나를 욕하면 어때. 내 속이 시원해졌으면 됐지. 역시 말하고 볼 일이네!'
  친구가 명언을 남겼다. 말을 안 할 거면 속상해하지 말든가, 속상해할 거면 말을 하란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생기면 혼자서만 끙끙 앓고 말을 안 했었다. 친구 말마따나 속에 쌓아두지나 말지. 결국 병이 났다.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내가 하고 싶은 말 잘 했다고 자랑해야겠다.

[우울증 수기] 15. 평온해서 이상한 밤 우울증 수기

  어제 친구를 만나 녹차 라떼를 마셨다. 카페인을 피하려고 계산대 앞에서 한참을 고르다 결정한 메뉴였다. 그래놓고 고른 메뉴가 녹차라니 엉뚱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나도 녹차에 카페인이 들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녹차 라떼에는 우유도 섞였고 설탕도 잔뜩 들었으니까 괜찮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 원래 초콜릿 음료를 마시고 싶었는데 나름대로 지난 번 겪은 최악을 제외했으니 만족스러웠다.
  카페에서 이렇게 메뉴 선정을 신중하게 하게 된 까닭이 있다. 우울증에 걸린 이래 카페인이 든 음료만 마시면 격해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그래서 카페인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카페에 가면 내가 마시고 싶은 음료에는 대체로 카페인이 들었다. 자제력에 한계가 온다.
  그렇게 자제력을 잃은 결과는 뻔했다. 우유든 설탕이든 카페인이 작용하지 않게 해줄 힘까진 없었나보다. 혹시나 하며 녹차 라떼를 3분의 2 정도만 마셨지만 역시나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약 기운 때문에 금방이라도 잠들 듯이 나른한데 막상 잠은 오지 않는, 굉장히 답답한 상황이다.
  다행히 전과 달리 화가 나서 벽을 때리거나, 감정이 격해져서 우는 일은 없었다. 보통은 잠이 안 와서 누운 채로 온갖 나쁜 생각을 하며 화를 내고 울었다. 다른 일이라도 하며 나쁜 생각을 떨치고 싶지만, 나른하고 졸려서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이상하게 평온했다. 우울증에 걸리기 전이라면 평온한 쪽이 정상이겠지만 지금 내 상태에서는 참 이상한 일이다. 어제 저녁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침부터 내내 우울했기 때문에 더 신기하다.
  혹시 자기 전에 남편에게 정신과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는 참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덕분일까? 그때 남편이 싫어하지 않고 안아주며 격려해주었기 때문일까? 정신과랑 상담 치료를 받아서 정말 좋아졌나? 잠을 자지 않는 대신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쁜 생각이나 자살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 나에게는 이런 작은 변화도 소중하다. 아직까지 나 자신의 힘보다는 타인의 영향이 더 크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변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하며 남 눈치 과하게 보지 않고 살고 싶다. 언제 다시 변덕을 부릴지 모르지만 좋아지겠다는 희망이 눈곱만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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