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수기] 55. 시간이 약이라는 허무하고도 당연한 말 우울증 수기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허무한 말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써도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만 한다니 속 편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말이 일리가 있음을 몸소 느꼈다. 다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오려고 했을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한 일도 두 달쯤 지나니 놀라우리만큼 잊혀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하고 울고 미워하고 잠 못 이루고 죽고 싶던 시간들이 어느새 지나고 이렇게 평온해졌는지 스스로도 신기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만, 내가 죽음으로써 나를 괴롭힌 그 사람에게 복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속적인 우울과 불안은 호전되었으므로 약을 끊었지만, 아직도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최소 이틀에서 한 달 정도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힘들다. 오늘도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는데 또 눈물을 한바탕 쏟아 내고 이 사람 저 사람을 괴롭혔다.
  다행히도 예전처럼 그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고,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문다. 다 옆에 있어 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죽고 싶었을 때 남편이 옆에 있지 않았다면, 고통이 옅어질 만큼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다. 운동을 꽤 열심히 해서 힘이 넘치기 때문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빨리 실행에 옮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남편은 그때 남들이 뭐라든 언제든지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해 놓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연연하고 있지 않느냐고도 물었다. 내 생각이 비합리적인 쪽으로 흘러갈 때 먼저 내 감정에 공감해 준 다음에 깨닫지 못한 점을 부드럽게 이해시켜 줘서 고맙고 도움이 많이 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오기까지 버티기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그 사이를 끝까지 견뎌 내지 못하고 갔을지도 모르고, 그 사이에 또 새로운 아픔이 연속해서 몰아치는 바람에 시간이 주는 치유를 느낄 새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입게 될 상처가 아물기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혹시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나이가 들면 고통에 대한 감각도 무뎌질까?

[우울증 수기] 54. 다시 찾아온 위기 우울증 수기

  약을 쭉 끊고 지금까지 어떻게 잘 버텼다. 우울증이었다는 사실도 잊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날도 많아졌다. 예전보다 조금 더 밖에 나가게 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나처럼 우울증을 겪은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신기하게도 처음 만난 날부터 자신과 내가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우울증이 있었으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밝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다. 하긴 나도 언제나 웃고 다녀서 우울증임을 알고 놀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많이들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만큼 감기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흔한 일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해서인지 빠르게 친해졌다.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친한 친구들은 나와 진정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고들 하는데 나도 놀랄 정도다. 친해진 만큼 나누는 이야기도 더 깊어졌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우울증으로 휴직을 했다가 다시 복직해서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복직이 두려워서 아예 다른 직종으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했기에, 복직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 자세히 물었다. 먼저, 생각보다 사람들은 우울증이니 뭐니 자기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배려한답시고 특별 대우를 하지 않아서 적응하기가 더 쉬웠다고 했다. 그리고 우울증의 원인을 제공한 갑질 상사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아 이제는 전처럼 당하고 살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은 베푼 대로 받는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운이 매우 좋은 경우일 수도 있지만, 문득 나도 예전 직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조금씩 생겼다. 주변에서 아무리 복직하라는 소리를 해도 와닿지 않았었는데, 같은 경험이 있는 데다가 내가 고민하던 일을 먼저 겪고 극복해낸 사람이 복직을 권하니 솔깃했다. 그렇게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간사하게도 좋은 기억들만 남아서 약을 끊고 얼마 후부터 한 번씩 떠오르곤 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자신만만한 상태로 복직할 의욕이 넘치다가, 어떤 날은 해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예전처럼 자책을 한다. 아직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 고약한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아직도 '나 혼자 어림짐작한'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을 너무 많이 곤두세운다. 항상 이 버릇이 나를 옥죈다. 밤만 되면 불안함과 긴장에 시달려 잠을 못 이루고 낮과 밤이 많이 바뀌었다. 이 점이 상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되돌리려고 노력 중이다. 잠에서 깨어 눈을 떠도 무기력하게 몇 시간씩 그대로 누워 있는 날도 늘었다. 어느새 다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심하게 아팠을 때로 돌아가지는 않을지, 겨우 약도 끊었는데 다시 약을 먹어야 하는지 너무 불안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도 몇 가지 있다. 아프고부터 시작한 운동을 꾸준히 놓지 않고 해 왔다. 오늘은 운동을 다녀오고 나니 잡념이 사라지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절로 웃음이 나서 황당하면서도 안심이 됐다. 내내 나를 책망하다가 펑펑 울고 나서도 슬픔이 가시지 않아 수십 번씩 울컥하면서 보냈는데 말이다. 또 친구가 태국 여행을 다녀온 뒤에 선물해 준 '인헤일러'가 도움이 된다. 뚜껑을 열고 숨을 들이마시면 진한 페퍼민트향이 난다. 향기를 맡기만 했는데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면서 진정이 되고, 바로 잠에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상태가 된다. 원래 무향을 좋아해서 향수나 향초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카모마일차를 마셔도 진정 효과가 있지만 이 향을 맡는 쪽이 나에게는 훨씬 효과가 강력했다. 이로써 오늘 다시 한 번 느꼈다.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질병들처럼 잘 먹고 운동을 하고 심지어 향기를 맡는 등 신체를 좋은 상태로 관리하면 효과가 있다. 완치란 없다고 생각하고 꾸준히 관리하며 살아야겠다.

[우울증 수기] 53. 약을 안 먹은 지 일주일째 우울증 수기

  약을 줄이면서 조금 불안하고 힘들긴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안정되었다. 이 정도는 내가 견딜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이제 안 먹어도 괜찮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약을 안 먹은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 6시까지 뜬눈으로 지샜다. 이 약을 먹으면 졸리다는 설명은 의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별로 체감한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날 아침에 특별히 늦잠을 더 자지도 않았고, 오히려 평소와 달리 약속을 두 건이나 잡아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결국 새벽 6시부터 한 다섯 시간 정도 기분 나쁜 꿈을 꾸며 설잠을 잤다. 이틀 정도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남편과 상의했더니, 커피는 되도록이면 마시지 말고 잠이 잘 오는 카모마일 차를 마셔 보자고 했다. 자기 전에 카모마일 차를 마셨더니 기분 탓인지 몰라도 정말 잠이 좀 더 잘 왔다. 점점 자는 시간이 한두 시간씩 줄어들어서 어제는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잠들었다. 꿈도 안 꾸고 일곱 시간 정도 아주 개운하게 잤다.
  이후로 우울함, 불안함, 무기력함도 점차 사라져 밥도 잘 먹고 별 생각 없이 편안하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슬프거나 화가 나는 사건을 대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더는 그런 일만 반복해서 곱씹지 않는다. 내 의지와 다르게 머릿속에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걸 의식하면 내가 제동을 건다.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느끼는지 생각해 보고 혼자 해결을 보는 경우도 있고,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 감정은 어린아이 대하듯 시끄러우니까 조용하라고 다그친다.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어서 내가 생각해도 우스울 때도 있다. 우울증이 심했을 때는 시도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 많이 건강해졌다고 느낀다.
  오래 우울증을 앓아 온 친구가 우울증은 재발이 잦고, 재발하면 더 위험하다고 언젠가 말했었다. 지금은 아무 걱정도 생각도 안 하련다. 아팠던 자리에 돋은 굳은살을 위안 삼는다. 나는 아프면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어떤 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는지 아니까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빨리 대처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울증 수기] 52. 약을 더 줄였다. 우울증 수기

  요새 나를 우선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일상에 변화가 많이 생겼다.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기란 불가능했다. 온갖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온전히 편안한 휴식을 즐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뒹굴뒹굴거리며 노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새삼스럽게 느낀다. 낯선 곳에도 많이 갔고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 사귀었다. 오래 나를 알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참 밝아졌다고 말한다.
  자신감을 얻고 병원에 가서 약을 언제 끊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런데 의사가 그건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해서 순간 의아했다. 하지만 곧 납득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증상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바로 끊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예전에 겪었던 시행착오가 두려워 망설였다. 그러자 의사는 일단 항우울제를 반으로 줄여 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또 한 번 약을 줄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먹는 약은 이렇다.
  - 저녁:  
환인탄산리튬정(300mg), 명인브로마제팜정 반 알(1.5mg)듀미록스정 반 알(50mg)
  겨우 1.5mg 줄였을 뿐이고, 의사도 그렇게 센 약이 아니라고 걱정 말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참 크게 느껴진다. 전에 환인탄산리튬정을 줄였을 때도 약의 반감기 때문에 적응 기간이 필요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다. 줄인지 이제 5일쯤 되었을까? 그동안 우울증 초중기에 겪었던 증상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주로 오후에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욱해서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고,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심하게 나거나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예전만큼 정도가 세지 않아서 스스로 노력해서 제어할 힘은 있다. 그 힘은 지금까지 충분히 쉬고 외부 자극을 차단하면서 만들어 놓은 힘이기도 하다. 언제까지고 숨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인데, 다시 내가 밖으로 나가면 또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다.



[우울증 수기] 51. 아침약을 뺀 뒤 경과 우울증 수기

  원래 아침약을 빼기 전까지는 자기 직전에 저녁약을 먹었었다. 그런데 밤에 너무 기분이 들뜨고 흥분이 되길래 요즘에는 저녁식사를 하고 얼마 뒤에 바로 먹기 시작했다. 아침약(환인탄산리튬정)이 기분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양이 줄어드니까 지속효과가 떨어진 모양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을 줄여도 이제 우울은 오지 않고 반대로 너무 신이 난다. 소리를 크게 지르고 싶어지거나 쓸데없는 수다를 너무너무 떨고 싶다. 전과 달리 내가 이상함을 빨리 눈치 채고 자제하기도 한다. 저녁약을 조금 더 빨리 당겨 먹음으로써 이런 증상은 나아졌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항상 남은 아침약을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닌다.
  최근에는 친구들을 무척 자주 만나고 친정에도 시댁에도 전보다 많이 갔다. 남편이 말하기를 내가 친구를 만나고 오면 평소와 다르게 표정도 밝고 기분이 정말 좋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 마음도 편하다고, 더 많이 만나라고 했다. 시댁도 더 편해지기는 했는데 아직 시아버지만큼은 어렵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계기가 있다. 시어머니가 고향에 내려가 계시는 동안 시아버지와 시동생만 있는 시댁에 가기로 며칠 전에 남편과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당일 아침에 정말 무서운 꿈을 선명하게 꾸었다. 얼굴은 없었지만 남편이라고 꿈속에서 인식하고 있던 남자가, 길고 커다란 칼로 나를 죽여서 온통 피범벅이 된 꿈이었다. 나중에 남편한테는 그냥 모르는 남자가 나를 죽였다고만 이야기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너무 무서워 남편을 꼭 붙잡고 한참 동안 못 일어났다. 몽롱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결국 다시 푹 자고 진정을 했다. 못 일어나고 다시 잠든 이유는 잠을 매일 새벽 2~3시에 자고 오전 10시 쯤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잠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리 중이었기 때문에 호르몬 영향도 있었겠고, 꿈 속에서 본 피도 그와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래도 은연중에 불안을 느꼈기에 그런 꿈을 꾸지는 않았나 혼자 생각했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놀랐다. 어디에서든 위협요소는 갑작스레 나타나곤 하니까 늘 조심해 가면서 연습해야겠다.
  남편이 없을 때는 끼니를 거르거나 대충 때우는데, 요새 들어 남편이 점심 시간마다 메시지를 보낸다. 밥 꼭 챙겨먹으라고. 처음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점점 그 마음이 고마워진다. 덕분에 나를 조금은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오늘은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었다. 저녁도 혼자 먹어야 하지만 즉석식품 말고 간단하게라도 요리를 하려고 한다. 나는 이 정도만 해도 많이 발전했다고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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