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수기] 53. 약을 안 먹은 지 일주일째 우울증 수기

  약을 줄이면서 조금 불안하고 힘들긴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안정되었다. 이 정도는 내가 견딜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이제 안 먹어도 괜찮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약을 안 먹은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 6시까지 뜬눈으로 지샜다. 이 약을 먹으면 졸리다는 설명은 의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별로 체감한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날 아침에 특별히 늦잠을 더 자지도 않았고, 오히려 평소와 달리 약속을 두 건이나 잡아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결국 새벽 6시부터 한 다섯 시간 정도 기분 나쁜 꿈을 꾸며 설잠을 잤다. 이틀 정도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남편과 상의했더니, 커피는 되도록이면 마시지 말고 잠이 잘 오는 카모마일 차를 마셔 보자고 했다. 자기 전에 카모마일 차를 마셨더니 기분 탓인지 몰라도 정말 잠이 좀 더 잘 왔다. 점점 자는 시간이 한두 시간씩 줄어들어서 어제는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잠들었다. 꿈도 안 꾸고 일곱 시간 정도 아주 개운하게 잤다.
  이후로 우울함, 불안함, 무기력함도 점차 사라져 밥도 잘 먹고 별 생각 없이 편안하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슬프거나 화가 나는 사건을 대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더는 그런 일만 반복해서 곱씹지 않는다. 내 의지와 다르게 머릿속에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걸 의식하면 내가 제동을 건다.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느끼는지 생각해 보고 혼자 해결을 보는 경우도 있고,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 감정은 어린아이 대하듯 시끄러우니까 조용하라고 다그친다.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어서 내가 생각해도 우스울 때도 있다. 우울증이 심했을 때는 시도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 많이 건강해졌다고 느낀다.
  오래 우울증을 앓아 온 친구가 우울증은 재발이 잦고, 재발하면 더 위험하다고 언젠가 말했었다. 지금은 아무 걱정도 생각도 안 하련다. 아팠던 자리에 돋은 굳은살을 위안 삼는다. 나는 아프면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어떤 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는지 아니까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빨리 대처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울증 수기] 52. 약을 더 줄였다. 우울증 수기

  요새 나를 우선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일상에 변화가 많이 생겼다.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기란 불가능했다. 온갖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온전히 편안한 휴식을 즐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뒹굴뒹굴거리며 노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새삼스럽게 느낀다. 낯선 곳에도 많이 갔고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 사귀었다. 오래 나를 알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참 밝아졌다고 말한다.
  자신감을 얻고 병원에 가서 약을 언제 끊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런데 의사가 그건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해서 순간 의아했다. 하지만 곧 납득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증상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바로 끊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예전에 겪었던 시행착오가 두려워 망설였다. 그러자 의사는 일단 항우울제를 반으로 줄여 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또 한 번 약을 줄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먹는 약은 이렇다.
  - 저녁:  
환인탄산리튬정(300mg), 명인브로마제팜정 반 알(1.5mg)듀미록스정 반 알(50mg)
  겨우 1.5mg 줄였을 뿐이고, 의사도 그렇게 센 약이 아니라고 걱정 말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참 크게 느껴진다. 전에 환인탄산리튬정을 줄였을 때도 약의 반감기 때문에 적응 기간이 필요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다. 줄인지 이제 5일쯤 되었을까? 그동안 우울증 초중기에 겪었던 증상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주로 오후에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욱해서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고,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심하게 나거나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예전만큼 정도가 세지 않아서 스스로 노력해서 제어할 힘은 있다. 그 힘은 지금까지 충분히 쉬고 외부 자극을 차단하면서 만들어 놓은 힘이기도 하다. 언제까지고 숨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인데, 다시 내가 밖으로 나가면 또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다.



[우울증 수기] 51. 아침약을 뺀 뒤 경과 우울증 수기

  원래 아침약을 빼기 전까지는 자기 직전에 저녁약을 먹었었다. 그런데 밤에 너무 기분이 들뜨고 흥분이 되길래 요즘에는 저녁식사를 하고 얼마 뒤에 바로 먹기 시작했다. 아침약(환인탄산리튬정)이 기분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양이 줄어드니까 지속효과가 떨어진 모양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을 줄여도 이제 우울은 오지 않고 반대로 너무 신이 난다. 소리를 크게 지르고 싶어지거나 쓸데없는 수다를 너무너무 떨고 싶다. 전과 달리 내가 이상함을 빨리 눈치 채고 자제하기도 한다. 저녁약을 조금 더 빨리 당겨 먹음으로써 이런 증상은 나아졌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항상 남은 아침약을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닌다.
  최근에는 친구들을 무척 자주 만나고 친정에도 시댁에도 전보다 많이 갔다. 남편이 말하기를 내가 친구를 만나고 오면 평소와 다르게 표정도 밝고 기분이 정말 좋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 마음도 편하다고, 더 많이 만나라고 했다. 시댁도 더 편해지기는 했는데 아직 시아버지만큼은 어렵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계기가 있다. 시어머니가 고향에 내려가 계시는 동안 시아버지와 시동생만 있는 시댁에 가기로 며칠 전에 남편과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당일 아침에 정말 무서운 꿈을 선명하게 꾸었다. 얼굴은 없었지만 남편이라고 꿈속에서 인식하고 있던 남자가, 길고 커다란 칼로 나를 죽여서 온통 피범벅이 된 꿈이었다. 나중에 남편한테는 그냥 모르는 남자가 나를 죽였다고만 이야기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너무 무서워 남편을 꼭 붙잡고 한참 동안 못 일어났다. 몽롱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결국 다시 푹 자고 진정을 했다. 못 일어나고 다시 잠든 이유는 잠을 매일 새벽 2~3시에 자고 오전 10시 쯤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잠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리 중이었기 때문에 호르몬 영향도 있었겠고, 꿈 속에서 본 피도 그와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래도 은연중에 불안을 느꼈기에 그런 꿈을 꾸지는 않았나 혼자 생각했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놀랐다. 어디에서든 위협요소는 갑작스레 나타나곤 하니까 늘 조심해 가면서 연습해야겠다.
  남편이 없을 때는 끼니를 거르거나 대충 때우는데, 요새 들어 남편이 점심 시간마다 메시지를 보낸다. 밥 꼭 챙겨먹으라고. 처음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점점 그 마음이 고마워진다. 덕분에 나를 조금은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오늘은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었다. 저녁도 혼자 먹어야 하지만 즉석식품 말고 간단하게라도 요리를 하려고 한다. 나는 이 정도만 해도 많이 발전했다고 위로해 본다.

[우울증 수기] 50. 아침약 빼다 우울증 수기

  요 몇 주 간 아침 약을 깜빡하고 안 먹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오후 늦게나 되서야 허겁지겁 먹었는데, 어느 날은 저녁 늦게까지도 안 먹은 줄을 몰라서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예 먹지 않았다. 사실은 기분이 좋은 상태로 꽤 길게 유지가 되고 있어서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더는 들지 않고 감정이 가라앉지도 않았다. 비록 잠과 식사가 불규칙하기는 하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몸이 전보다 건강해짐을 느꼈다. 남편이나 친구들과 대화도 많아졌고 그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래서 3일 동안 아침 약을 안 먹어보니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고 또렷하여 무슨 일을 해도 잘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 주관적인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마침 병원에 갈 때가 돼서 이참에 아침 약을 빼달라고 말해보았다. 의사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앞으로 상태를 지켜보고 다시 조정해가겠지만 일단 기쁘다.


[우울증 수기] 49. 공감과 배려의 비극 우울증 수기

  친구들과 만든 모임에서 한 친구가 떨어져나갔다. 그 친구가 사소한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참고 또 참다가 폭발했다. 서로 감정을 그때그때 표현하지 못하다가 생긴 비극이다. 나는 두 쪽 다 이해가 간다. 잘못한 친구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데도, 이 친구의 피치 못할 사정에 대해 내가 설명해주었는데도 용서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 친구와 지낸 시간이 더 길고 정도 더 많이 들었으니 나만 이해하는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두 쪽 다 공감이 간다. 앞으로도 두 쪽 다 친하게 지내며 만날 것이다.
  내게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교 재학 시절에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그 후 지금까지 양쪽 친구를 모두 꾸준히 만나고 연락하며 친하게 지낸다. 두 번씩이나 같은 경험을 하고 나서 고민하다가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나는 모두를 이해하려고, 상처주지 않으려고 너무 애쓴다.
  예를 들어 친구는 모르는데 나는 잘 아는 상식이 있다면 나는 같이 모르는 척 할 때가 많다. 그런 경우 다른 친구는 망설이지 않고 지적한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하면 상대방 취향에 거의 맞춘다. 내 의견을 물어볼 때는 최대한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말하는 법을 고민하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준다. 때로는 상대가 고민이나 울분을 털어놓으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들어준다. 심지어는 맞장구도 친다. 상처입은 마음을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어서 말이다. TV나 영화를 볼 때 등장인물에 폭 빠져 눈물을 펑펑 흘리고는 한다. 내 앞에서 누가 눈물을 흘리면 함께 운다. 당시 같이 있던 사람 중에 나만큼 우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던 시절에 상담사가 했던 질문이 있다. 내가 왜 그렇게 잘하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찾다가, 부모님이 강요하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아니라고 답했다. 그때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상담도 그만두었는데 이번 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깨달았다. 나는 내가 잘하면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행복했다. 내가 잘하면 선생님이 칭찬하는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아무도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지 않는다. 못하면 비난을 견뎌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나는 그것을 버티지 못했다. 첫 직장에서는 좋은 상사와 선배를 만나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받았기에 버텼지만, 그 다음 단계부터는 진짜 성인으로 거듭나야만 했었다. 이직을 하고 결혼도 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했던 나는, 이게 칭찬이지 욕인지 알기 어려운, 빙빙 돌리는 말들을 듣고 혼란스러웠다. 결국 모두 나를 비난한다고 비관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까지도 내가 도전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는 사람이 생기자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 미련하게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쪽보다 타인의 평가 쪽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음이 분명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자랑이 아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바로 내가 비난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못난 자존심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내가 행복하다고 믿고 싶었음을, 그 환상이 깨지자 매일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면서 살게 됐음을 이제야 깨달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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