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수기] 31. 사람은 변하기 마련 우울증 수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다. 남들에 비해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혼자 꿍해있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충동적으로 무엇을 하는 일은 거의 적으며, 오래 고민하고 계획해서 일을 추진한다. 누구에게나 잘 보이고 싶어서 타인을 배려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참곤 한다. 가족과 친구 앞에서는 고집이 세다. 스스로 평가하는 내 성격은 이랬다. 과거형이 되어버린 이유는, 지금 내 성격을 확실히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몇 가지는 정반대로 뒤집어지기까지 했다. 오늘은 또 낯선 나로 살았지만, 내일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 모르겠다.
  이런 나에 대해 동생에게 상담을 했다. 동생은 나보다 두 살 어리지만 사회 생활 경험이 더 많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보다 언니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너무 달라서 엄청나게 싸우며 컸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다. 오히려 성격과 취미가 완전히 다르기에 서로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조언할 수 있었다. 내가 혼자서 사소한 일로 무겁게 고민하고 있으면, 동생은 항상 별 일 아닌 듯 가볍게 말을 건냈다. 그러면 나도 그제서야 웃음을 되찾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변해가는 내가 너무 이상하다며 여러 가지 증상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동생은 역시 대수롭지 않게, 사람은 원래 변하기 마련이라고 걱정 말라고 얘기해줬다. 그러고보니 변하지 않는 사람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의 나와 1년 전의 나는 분명 다르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해보아도 당연히 사람은 변한다며 같은 얘기를 한다. 간단한 답이지만 크게 마음이 놓인다.
  혼자 고민하는 일은 늪에 빠져 점점 가라앉기만 하는 느낌이다. 누가 보면 고민 거리도 아닐지 모르지만, 생각의 수렁에 빠지면 바로 옆에 있는 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동생의 말과 같은 한 마디는 나를 늪에서 꺼내주는 밧줄과 같이 느껴진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해주는 말인지 아닌지 직감으로 안다. 가끔 우울증에 대한 무지로 인해 도움이 안 되는 조언이나 선물을 받기도 하지만, 그 마음만은 느껴지기에 굉장히 고맙다. 동생 덕분에 변하고 있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조금 되었다.

[우울증 수기] 30. 감정 널뛰기 우울증 수기

  요새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어이가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기분으로 살아갈지 궁금하다. 기분이 너무 들떠서 항우울제를 반으로 줄인 뒤, 처음 이틀 동안은 다시 심하게 우울했었다. 그래서 약을 원래대로 늘려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더니 셋째 날에는 또 그 전처럼 너무 흥이 나서 주체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틀 쯤 살고 나니 또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이처럼 심하게 밝다가 다시 기분이 처지고 힘이 빠질 때면, 우울한 와중에도 우스워서 씨익 웃고 만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같이 사는 신랑은 더 당황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티를 안 내서 고마울 뿐이다. 

  기분이 최고 상태일 때 증상을 기록해본다. 평생 살면서 이런 적이 없기에 내 스스로가 너무 신기하고 우습다.
  1. 평소에 억지로 겨우 하던 집안일도 힘이 넘쳐서 손쉽게 끝낸다.
  2. 안 해봤던 요리도 요리법을 검색하고 재료를 사와서 도전한다.
  3. 아무 때나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아는 노래 뿐만 아니라 없는 노래도 지어서 '신랑 사랑해'하며 가사를 붙여 부른다.
  4. 충동적으로 미용실에 가서 몇 주째 망설이고 있던 머리를 한다.
  5. 평소에는 미용사가 말 걸면 단답형으로 끝내서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말 걸어가며 신나게 수다를 떤다.
  6. 집에서도 신랑한테 쉴 새 없이 말을 건다. 말을 안 걸고 가만히 있자니까 안절부절 못하겠다.
  7. 안 해도 되는 쓸데없는 말까지 다 털어놓는다. 친구한테 신랑이 나 울렸다고 흉 본 일, 말하고 나서 후회되는 마음까지 모조리.
  8. 아무 일도 없는데 웃음이 난다.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숨도 못 쉬고 웃기도 한다.

  힘이 넘쳤을 때 요리하려고 사놓은 재료가 냉장고에 그대로 있다. 살 때만 해도 씩씩하게 뭐든 잘할 듯했는데 다시 우울상태로 돌아와서 요리는 커녕 끼니도 못 챙겨 먹을 판이다. 저게 썩기 전에 몸이 좀 움직였으면 좋겠다.

[우울증 수기] 29. 책 선물 우울증 수기

  이번에 책을 선물 받았다. 자존감에 관한 자기계발서 종류다. 선물한 친구는 자기가 읽어보고 너무 좋아서 선물하게 되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아마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기분 나빠할까봐 조심스러웠던 듯하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나를 생각하며 고심해서 선물을 골라준 마음이 고마워서 아주 기쁘게 선물을 받았다. 선물 받은 책을 찬찬히 읽어보니 일러스트가 재치있고 기발해서 좋다. 글도 젊은 사람이 써서 그런지 공감이 가고 재미있다. 그러나 자기계발서는 역시 어딘지 모르게 이래라 저래라 훈계를 받는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이 친구 말고 신랑도 책 한 권을 슬쩍 내 책상 위에 갖다놓은 적이 있다. 정신과 의사가 쓴 유명한 베스트셀러인데 역시 자존감에 대한 내용이었다. 읽어봤지만 심드렁해지기만 했다. 참 좋은 글이고 나도 공감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원래부터 자존감이 낮아서 이렇게 아파하며 살고 있지 않다는 반발심이 생겼다. 예전부터 나는 스스로 자존감이 높다고 자부해왔다. 우울증은 자존감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아마 나처럼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아 우울'감'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책을 썼을 것이다.
  이렇게 책을 몇 권 선물 받게 되면서, 몇 년 전 대학생 때 내가 친구에게 선물해준 책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됐다. 그때 그 친구가 내 주변에서 처음으로 우울증을 겪었는데, 나도 참 무지했다. 그 책도 내가 요즘 받은 책처럼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쓴 자존감에 대한 책이었다. 물론 나 역시 무척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우울증을 앓는 친구에게 그 책을 선물했다. 그 친구도 기쁘게 선물을 받아주었지만 별로 좋은 선물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오히려 나쁜 선물이었다. 그때도 우울증이 뇌의 문제란 사실을 어렴풋이 들었지만 제대로 이해는 하지 못했었다. 우울증에 의지가 작용한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기에,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움직이고 몸도 움직여서 우울증이 낫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최근 내 경험에 의하면 책에 집중이 잘 안 되니까 일단 좌절하게 되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책에서 말하는 대로 생각을 바꾸거나 행동하지 못하니까 자책하는 과정을 겪는다. 안 그래도 우울증으로 힘든데 안 읽었어도 그만인 책 때문에 더 괴로워진다니 선물한 사람에게도 받은 사람에게도 모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우울증에 걸리고 나서 제일 싫어하게 된 단어가 '의지'다. 우울증이 의지로 낫지 않는다는 사실, 극심한 무기력과 자살사고에 시달려 의지가 개입할 여지도 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알려줘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약을 꾸준히 먹고 호전되고 나서야 의지가 필요한 일을 시도하는 중인데 쉽지는 않다. 일단 집중력이 많이 돌아와서 책을 막힘 없이 술술 읽는 날이 생겼다. 또 매일 한 바닥씩 글을 배껴쓰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 반만 써도 지쳐서 후반부는 흐지부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한 바닥을 문제 없이 수월하게 쓰게 되었다. 이렇게 의지를 발휘하게 되기까지 수없이 힘들어하고 아파했으며, 지금도 일주일에 며칠은 극심한 우울 상태로 돌아간다.
  많이 기억하기 힘들면 딱 하나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우울증인 사람에게 좌절과 자책만 더해주는 자기계발서 선물은 피하자.


[우울증 수기] 28. 드디어 줄인 약 우울증 수기

  약을 늘린 적은 있어도 줄인 적은 없었는데 처음이다. 정확히 말하면 항우울제를 반으로 줄이게 되었다. 얼마 동안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누워만 있고 끼니도 거르며 우울해했는데, 최근에 이상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별 일 아닌데 우스워서 숨이 넘어가게 웃고는 했다. 머리로는 왜 웃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나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더는 누워만 있지 않고 일어나 요리를 해서 밥을 챙겨 먹었다. 아무 일 없는데도 기분이 들뜨고 좋았다.
  약이 다 떨어져 병원 갈 때가 되어서 곧장 증세를 얘기했다. 너무 들뜬다고 느낀다면 항우울제를 반으로 줄여보자고 했다. 항우울제가 그냥 우울하지 않게 막아주는 줄로만 짐작했는데, 이런 효과가 있는 약인 줄은 이제 알았다. 약을 잠시 끊었을 때 이후부터 계산하면 한 네 달 정도는 먹은 셈인데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는 생각도 든다. 의사가 지금 상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하긴 우울해서 다 죽어가는 나보다는 이 쪽이 훨씬 우울증 걸리기 전과 닮았다. 이렇게 허파에 바람 들어간 사람처럼 웃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약을 줄여서 먹고 딱 하루가 지났는데, 들뜨는 기분과 숨 넘어가는 웃음은 없어졌다. 밥은 즉석식품을 먹지 않고 요리해서 먹었다. 집안일도 깔끔하게 했다. 그런데 또 힘이 다 빠지고 누워있게 된다. 며칠 전 만큼은 아니니까 다행이지만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우울증 수기] 27. 가장 노력하고 있는 일 우울증 수기

  여행 후에 약 일주일 간 아주 들떠있었다. 정말 예전 내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거품이 꺼지고 결국 다시 우울함에 잠기고 말았다.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 이 병이 밉고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약을 처음 먹고 금방 좋아져서 우울증이 아닌 줄 알고 쉽게 약을 끊어버렸을 때 같다. 약을 끊은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 적은 꽤 많다. 단순히 우울한 기분이 조금 오래 지속되었을 뿐이고 우울증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이따금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갈수록 나아지기보다는 깊어지는 우울함과 무기력 앞에서, 내가 진짜로 아프다는 사실을 매일 마주한다.
  약은 꾸준히 먹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삶의 질이 많이 나빠졌다. 식사를 자주 거르고 그나마 먹는 것이라고는 즉석 식품이나 빵, 시리얼이다. 심지어 어머니가 해준 반찬을 꺼내서 데워 먹는 일도 힘들어서 평소 먹던 즉석 식품을 꺼낸다.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는 시간이 하루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누워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야 하거나 친구가 불러주지 않으면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새벽 4~5시쯤 잠들고 오후 1~2시에 일어난다. 이 모두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내가 싫어하는 행동들이다. 너무 싫은데 무기력을 버티지 못하고 그렇게 산다. 그러다보니 자괴감이 드는 때가 많다. 우울증이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열심히 하기 싫어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의문이 든다. 내가 히키코모리 직전 단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든다. 무엇보다 다시 내 삶을 살아낼 자신이 들지 않는다.
  베란다 창 밖을 내다 보면서 떨어지는 상상을 많이 한다. 기사로 사망사고를 접하면, 그 죄없는 사람은 살려주고 내가 대신 죽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자살 소식을 접하면 남 일 같지 않아 자세히 읽어보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마음 아파한다. 약 먹기 전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아직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데도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비록 왜 사는지 모르지만, 폐인처럼 생활하지만, 그 와중에 가장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 일이 있다. 살아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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